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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수유동(1편)-가오리 지명의 유래

수유리(동)에 처음 이사를 간게 1988년으로 기억한다. 올림픽이 있었던 해이니.. (1988년 ~ 2006년, 18년 살았군요)

수유동보다는 역시 수유리가 입에 붙는다.

월계동에서 수유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419민주묘지역이 생기면서 본가가 방학동으로 이사를 하게되면서 수유리에는 더이상 跡이 없다.

얼마전 가오리를 지나다가 가오리역이 생긴것을 봤다. 가오리역이라니!!! 30년전을 생각하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도 가오리4거리에 20년전에 볼링장도 들어오고, 원래부터 소방서, 경찰서도 있고 벽산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오면서 동네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서울도심 지하철역, 하다못해 수유역주변에 비하더라고 시골읍네 느낌이었는데, 지하철역이 생겨 가오리에대한 글을 남겨본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화계사와 419민주묘지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이 지역이 아주 오래된 지역이라 수유리, 가오리, 빨래골, 장미원 등등 옛지명이 아직 살아 있다. 행정명으로 불려야하지만 수백년간 불려왔던 지명이 한번에 바뀌겠습니까???

가오리라고 불리게된 이유롤 여러가지설이 있지만, Fact만 본다면

 

'도성 10리(4Km)안에 매장이 금지되어, 5리(2Km)를 더가서 장사를 지내는 곳'의 의미인거 같다.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경복궁에서 미아리까지 대략 10리(4~6Km), 그리고 미아리에서 가오리까지가 대략 5리(2Km)니 맞는거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미아리의 묘지가 포화되어 문제가 많고, 왕이 곡소리를 듣기 싫어 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영조3년 승정원 일기를 보면

금장(禁葬)의 경계는 도성 밖 10리가 원칙이나 특별히 동쪽으로는 5리를 더하여 15리 되는 곳에 금표를 정하였고, 그곳 지명을 가오리촌(加五里村)이라 하였다. 《承政院日記 肅宗 26年 6月 5日, 31年 8月 24日》

 

가오리 역시 주로 장례를 치루던 곳이었던거 같다. 거기에 우이동그린파크에서 방학동을 넘어가는 고개를 보면 지금도 공동묘지가 있는 것을 보면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뒷받침해주는 것 같다. 또한 연산군묘, 정혜공주묘등이 가오리주변에 있으니.. 가오리라는 명칭은 한자그대로 오리를 더가서 장사를 지내시오의 뜻이다.

 

실제 가오리의 명칭은 정조12년10월16일 지정이 되었네요. 출처: 조선왕조실록!

가오리계(加五里契)ㆍ수유촌계(水踰村契)ㆍ능동계(陵洞契)ㆍ사아리계(沙阿里契)ㆍ번리계(樊里契)ㆍ우이리계(牛耳里契)는 숭신방계(崇信坊契)에 소속시켰습니다.

 

고향가 같은 곳이라.. 가오리가 더 잘되었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정조 12년 무신(1788) 10월 16일(갑진)

12-10-16[02] 각부의 방과 계의 이름을 정해주다

[DCI]ITKC_JT_V0_A12_10A_16A_00020_2005_013_XML DCI복사 URL복사
각부(各部)의 방(坊)과 계(契)의 명칭을 정하였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동부(東部) 흥인문(興仁門) 밖 역일계(驛一契)ㆍ역이계(驛二契)ㆍ사계(私契)ㆍ마장리계(馬場里契)ㆍ답십리계(踏十里契)ㆍ전농리계(典農里契)ㆍ청량리계(淸凉里契)ㆍ제기리계(祭基里契)ㆍ중랑포계(中浪浦契)ㆍ장위리계(長位里契)는 인창방(仁昌坊)에 소속시키고, 신설계(新設契)ㆍ안암리계(安巖里契)ㆍ어창계(御倉契)ㆍ종암리계(鍾巖里契)가오리계(加五里契)ㆍ수유촌계(水踰村契)ㆍ능동계(陵洞契)ㆍ사아리계(沙阿里契)ㆍ번리계(樊里契)ㆍ우이리계(牛耳里契)는 숭신방계(崇信坊契)에 소속시켰습니다.
북부(北部)의 선혜청계(宣惠廳契)ㆍ경리청계(經理廳契)ㆍ조지서계(造紙署契)ㆍ훈창계(訓倉契)ㆍ금창계(禁倉契)ㆍ어창계(御倉契)를 하나의 방으로 만들고, 홍제원계(弘濟院契)ㆍ양철리계(梁哲里契)ㆍ역계(驛契)ㆍ사계(私契)ㆍ불광리계(佛光里契)ㆍ갈현계(葛峴契)ㆍ신사동계(新寺洞契)ㆍ말흘산계(末屹山契)를 하나의 방(坊)으로 만들고, 아현계(阿峴契)ㆍ세교리(細橋里) 1계와 2계ㆍ연희궁계(延禧宮契)ㆍ가좌동(嘉佐洞) 1계와 2계ㆍ성산리계(城山里契)ㆍ증산리계(甑山里契)ㆍ수색리계(水色里契)ㆍ휴암리계(鵂巖里契)ㆍ구리계(舊里契)ㆍ망원정(望遠亭) 1계와 2계와 3계ㆍ합정리계(合亭里契)ㆍ여화도계(汝火島契)를 하나의 방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세 방의 이름을 감히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선혜청계 이하 여섯 계의 방명(坊名)은 상평방(常平坊)이라 정하고, 홍제원계 이하 여덟 계의 방명은 연은방(延恩坊)이라 정하고, 아현계 이하 열여섯 계의 방명은 연희방(延禧坊)이라 정하고서, 금년부터는 호적(戶籍)에 이 방명을 들어 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한성부 판윤 서유방(徐有防)이 또 아뢰기를,
“동부의 인창방ㆍ숭신방 두 계는 방의 이름을 그대로 계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창선방(昌善坊)에는 계의 이름이 없으니 창선방 1계ㆍ2계로 정해 시행하겠습니다. 어의동계(於義洞契)가 전에는 건덕방(建德坊)에 속했었는데, 경모궁방(景慕宮坊)으로 방의 이름을 품정(稟定)한 뒤로 아직까지 소속된 곳이 없으니 종전대로 건덕방에 소속시키는 것으로 정해서 시행하겠습니다. 북부의 광화방(廣化坊)ㆍ양덕방(陽德坊)ㆍ가회방(嘉會坊)ㆍ관광방(觀光坊)ㆍ진장방(鎭長坊)에는 계의 이름이 없으니 본동(本洞)의 속명(俗名)대로 광화방 원동계(苑洞契), 양덕방 계생동계(桂生洞契), 가회방 재동계(齋洞契), 관광방 부계(部契), 진장방 삼청동계(三淸洞契)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가하다고 하였다. 이때 다리 얹는 것을 금지하는 절목을 반포해 시행해야 했는데, 각부(各部)에 계만 있고 방이 없거나 방만 있고 계가 없는 곳이 있었으므로 비로소 그 이름을 정한 것이다.
【원전】 46 집 10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풍속(風俗)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2년 병오 > 12월 6일 > 최종정보

아홉째, 도성 내의 절박한 백성의 고통으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상장(喪葬)의 대사는 인간의 중대한 일입니다. 자식 된 자가 누군들 선산에 소나무를 기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대를 계장(繼葬)하거나 나무뿌리가 묘를 침범한 곳에는 그 묘 옆의 어린 소나무를 베어 내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른바 산지기 무리가 금송(禁松)이라고 칭하면서 계장한 곳을 찾아내거나 혹은 곁으로 벋어 나온 소나무를 벤 흔적이 있으면 금송을 범하였다고 칭탁하며 끝도 없이 침학하고 뇌물을 요구하니, 이것이 첫 번째로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또 절사(節祀)를 지낸 이튿날에 산지기 무리가 부유한 사람의 묘소를 샅샅이 찾아내어 자신들이 직접 소나무를 베어 묘 옆에 흩어 두고는 묘의 주인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제사를 지낼 때 어린 소나무를 어지러이 베어 이 지경을 만들었으니 이를 본부에 정과(呈課)하겠다.’라고 하며 여력을 남기지 않고 공갈하고 협박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다음에야 그친다고 하니, 두 번째로 지극히 통탄스러운 점입니다. 혹 오래도록 묵은 곳에 장사를 지내면 전혀 알지 못하는 자가 입안(立案)한 곳이라고 거짓으로 칭하며 지나친 대가를 거두는 것이 이미 고질적 폐단이 되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로 조정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도성 밖 동쪽과 서쪽 교외의 10리 안에 매장을 금지하는 것은 고금의 변치 않는 규례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동쪽 교외의 물엄현(勿奄峴)은 도성에서 10리 밖인데도 산지기 무리가 매장을 금지하는 곳임을 빙자하여 침노하고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과연 매장을 금지하는 곳이라면 물엄현(勿淹峴) 서쪽 상하 가오리촌(加五里村) 일대에도 어찌하여 수천 기의 무덤을 매장하였을 리가 있습니까. 이 가오리은 그 거리가 물엄현 동쪽의 벌리(伐里)와 차이가 없으며 또 나라의 능과 산맥이 이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산지기가 매장을 금지하는 일이 있는 것은 뇌물을 받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동일한 경내에서 매장을 금지하는 것이 이렇게 고르지 않다면 조정이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하는 정사에 있어 어찌 부족하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인구가 번성하여 여러 무덤이 별처럼 나열되어 남은 땅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의릉(懿陵)과 대충(對沖)하는 곳의 무덤을 수백 기나 파서 옮긴 나머지 도성에서 수십 리 안쪽에는 장사 지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친 백성들이 수삼십 리를 운구할 때에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이 또한 네 번째로 도성 백성들이 목이 타도록 번민하는 것입니다. 신은 선산에 계장하는 곳과 나무뿌리가 묘를 침범하는 곳에 각각 약간 벌목할 자는 먼저 경조(京兆)에 아뢰도록 한 뒤에 참작하여 금령을 풀어 준다면 산지기가 폐단을 일으키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3년 정미 > 5월 25일 > 최종정보

[주-D001] 동도(東道)는 …… 주었다 : 
금장(禁葬)의 경계는 도성 밖 10리가 원칙이나 특별히 동쪽으로는 5리를 더하여 15리 되는 곳에 금표를 정하였고, 그곳 지명을 가오리촌(加五里村)이라 하였다. 《承政院日記 肅宗 26年 6月 5日, 31年 8月 24日》

 

고종 22년 을유(1885) 6월 29일(병신) 맑음

22-06-29[45] 동부 자내의 6월 19일까지의 비 피해를 적간한 결과를 보고하는 선전관 김범구의 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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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간하고 온 선전관 김범구(金範求)의 서계에,
“신이 이달 9일 술시경에 삼가 승정원에 내리신 전교를 받들어 동부(東部) 자내로 달려가 상세히 살펴보았더니 외계 12곳과 내계 9곳이 무너졌습니다. 그 신분과 성명을 아래에 기록합니다.
을유년 6월 19일까지의 현황입니다. 외계 번리(樊里) 전 어영군(御營軍) 이만준(李萬俊)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장위리(長位里) 양인 이 소회(李所回)의 초가 8칸 중에 3칸이 무너졌으며, 종암리(鍾巖里) 양인 조만순(趙萬順)의 초가 6칸 중에 3칸이 무너졌습니다. 안암동(安巖洞) 양인 김삽사리(金揷沙里)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신설계(新設契) 전 어영군 이춘석(李春石)의 초가 6칸 중에 2칸이 무너졌으며, 신평리사계(新坪里私契)양인 장선길(張先吉)의 초가 6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최순용(崔順用)의 초가 6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귀복(李貴卜)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습니다. 신평리 1계 양인 김삼돌(金三乭)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선이(李先伊)의 초가 7칸 중에 5칸이 무너졌으며, 신평리 2계 양인 심씨종(沈氏宗)의 초가 4칸 중에 1칸이 무너졌고, 독녀(獨女) 정 조이(鄭召史)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정 조이(鄭召史)의 초가 3칸이 전부 무너졌습니다. 가오리계(加五里)양인 이복이(李卜伊)의 초가 4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남석(金男石)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으며, 미아리계(彌阿里契) 양인 강의길(姜宜吉)의 초가 4칸이 전부 무너졌고, 윤귀길(尹貴吉)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의관(李宜官)의 초가 6칸 중에 2칸이 무너졌습니다. 수유촌계(水逾村契) 양인 김선유(金善有)의 초가 6칸이 전부 무너졌고, 박길이(朴吉伊)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원석(李元石)의 초가 6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원복(金元福)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습니다. 신평리 사계(新坪里私契) 하감정동(下甘井洞) 양인 최순용(崔順用)의 가옥이 전부 무너졌을 때 당시 나이 50세 된 최순용의 어미 김 조이(金召史)가 즉사하였고, 같은 마을에 사는 이자의(李字宜)의 9세 된 여식 이근복희(李斤福喜)가 마침 최순용의 집에 갔다가 함께 죽었습니다. 동학동(東學洞) 양인 이봉학(李奉學)의 - 원문 빠짐 - 6칸이 전부 무너졌고, 원태규(元台圭)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박준만(朴俊萬)의 초가 9칸이 전부 무너졌고, 정흥기(鄭興起)의 초가 7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백경이(白景伊)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이순원(李順元)의 초가 8칸이 전부 무너졌고, 함춘식(咸春植)의 초가 8칸이 전부 무너졌고, 고 조이(高召史)의 초가 7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조두성(趙斗成)의 초가 11칸 중에 4칸이 무너졌고, 이동욱(李東郁)의 초가 10칸이 전부 무너졌습니다. 창선방(昌善坊) 양인 이성대(李聖大)의 초가 7칸 중에 4칸이 무너졌고, 김현관(金玄官)의 초가 8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응칠(金應七)의 초가 8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용원(金用元)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황종옥(黃宗玉)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강진오(姜辰五)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안업(金安業)의 초가 7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손원규(孫元圭)의 초가 6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김경은(金景殷)의 초가 7칸 중에 4칸이 무너졌고, 장만길(張萬吉)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오경운(吳景云)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기혁(金己赫)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이시택(李時宅)의 초가 10칸 중에 4칸이 무너졌고, 장의식(張義植)의 초가 7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최흥식(崔興植)의 초가 7칸 중에 3칸이 무너졌습니다. 중로계(中路契) 양인 유치준(柳致俊)의 초가 4칸이 전부 무너졌고, 최 소회(崔所回)의 초가 6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만손(金萬孫)의 초가 4칸이 전부 무너졌고, 박석조(朴石祚)의 초가 6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복이(金卜伊)의 초가 6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성복이(成卜伊)의 와가 13칸 중에 6칸이 무너졌으며, 종묘동(宗廟洞) 양인 이두명(李斗明)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봉규(金奉圭)의 초가 6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심운명(沈云明)의 초가 7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박인혁(朴仁赫)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양인화(梁仁化)의 초가 10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이금두(李今斗)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성민(李聖民)의 와가 12칸 중에 4칸이 무너졌고, 이성구(李聖九)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습니다. 연지동(蓮池洞) 양인 이복이(李卜伊)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서 조이(徐召史)의 와가 8칸 중에 1칸이 무너졌고, 이용이(李用伊)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민용(李民用)의 와가 7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엄금범(嚴今凡)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김대윤(金大允)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차순여(車順汝)의 와가 10칸 중에 3칸이 무너졌으며, 어의동(於義洞) 양인 이경화(李景化)의 초가 10칸 중에 6칸이 무너졌고, 장희중(張喜中)의 초가 8칸이 전부 무너졌고, 유봉완(柳奉完)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방흥선(方興善)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오 조이(吳召史)의 와가 10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황영길(黃永吉)의 초가 3칸이 전부 무너졌고, 민호관(閔浩官)의 초가 4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귀석(李貴石)의 초가 9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봉원근(奉元根)의 초가 8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김봉화(金奉化)의 초가 9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여준(李汝俊)의 초가 8칸이 전부 무너졌고, 한영호(韓永浩)의 초가 7칸 중에 4칸이 무너졌고, 박영돌(朴永乭)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박장길(朴長吉)의 초가 8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김만복(金萬卜)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윤갑(李允甲)의 초가 8칸 중에 3칸이 무너졌습니다. 경모궁(景慕宮) 1계 양인 강봉이(姜奉伊)의 초가 9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흥관(李興官)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김창순(金昌順)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이영복(李永福)의 초가 8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박칠업(朴七業)의 와가 11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전 감역관 이관익(李觀翼)의 초가 13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전 도사 오화수(吳和秀)의 초가 7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강복록(姜卜祿)의 초가 6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치근(金致根)의 초가 10칸이 전부 무너졌으며, 경모궁 2계 양인 김치범(金致凡)의 초가 6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오명화(吳明化)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박영여(朴永汝)의 초가 6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정태평(鄭太平)의 초가 6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강수천(姜守天)의 초가 5칸이 전부 무너졌고, 조성희(趙成喜)의 초가 12칸 중에 9칸이 무너졌고, 이광여(李光汝)의 초가 6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유학 이선익(李善翼)의 초가 7칸이 전부 무너졌고, 유학 이민익(李民翼)의 초가 8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민수(李民水)의 초가 9칸 중에 5칸이 무너졌고, 김돌만(金乭萬)의 초가 5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박경화(朴景化)의 초가 3칸이 전부 무너졌고, 이순복(李順卜)의 초가 4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홍재길(洪在吉)의 초가 10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남춘명(南春明)의 초가 4칸이 전부 무너졌고, 추업동(秋業同)의 초가 4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정만길(鄭萬吉)의 초가 7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성균관 양인 홍종윤(洪宗允)의 초가 7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맹길이(孟吉伊)의 초가 4칸이 전부 무너졌고, 김성윤(金成允)의 초가 6칸 중에 3칸이 무너졌고, 김창운(金昌云)의 초가 10칸 중에 5칸이 무너졌고, 정용이(鄭用伊)의 와가 7칸 중에 2칸이 무너졌고, 정만용(鄭萬用)의 와가 3칸이 전부 무너졌습니다. 이상 119호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고종 30년 계사(1893) 7월 10일(경인) 맑음

30-07-10[20] 동부 자내의 무너진 곳을 적간하여 보고하는 선전관 정승원의 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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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간한 선전관 정승원(鄭承源)이 서계하기를,
“신이 6월 30일 신시쯤 삼가 승정원에서 내린 전교를 받들고 동부(東部) 자내로 달려가서 자세히 간심해 보니, 외계(外契) 아홉 곳이 무너졌고 내계(內契) 다섯 곳이 무너졌는데 직역과 성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계는 숭신방(崇信坊)의 중랑상리계(中浪上里契) 양인 안용원(安用元), 가오리계(加五里契) 양인 홍순명(洪順明), 우이리계(牛耳里契) 양인 장재명(張在明), 장위리계(長位里契) 양인 박인서(朴仁瑞), 능동계(陵洞契). 양인 최순장(崔順長), 벌리계(伐里契) 양인 이순득(李順得), 수유촌계(水逾村契) 양인 김순흥(金順興) 등 2호, 인창방(仁昌坊)의 왕십리계(往十里契) 양인 이창서(李昌瑞) 등 2호, 답십리계(踏十里契) 양인 이덕호(李德浩)이고, 내계는 건덕방(建德坊)의 양인 윤군명(尹君明), 연화방(蓮花坊)의 연지동계(蓮池洞契) 양인 백남주(白南周), 창선방(昌善坊)의 양사동계(兩司洞契) 양인 홍경재(洪敬在) 등 2호, 동학동계(東學洞契) 양인 정윤명(鄭允明) 등 2호, 이상 17호입니다.”
하였다. 

 

 

 

 #가오리역,

#우이경전철,

#가오리,

#빨래골,

#수유리,

#동네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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